서 · 서문

그날을 기억하는 두 사람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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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감옥에 갇힌 아들을 만나러 어머니가 온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 같은 어머니다. 그런데 면회 자리에서 아들은 뜻밖의 기억을 꺼낸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일을 기억한다고.

이것은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옮긴 문장이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의 뜻이다. 정확한 말의 순서보다 오래 남은 것은 김혜자 배우의 얼굴과 몸이었다. 아들의 말 앞에서 어머니는 몸을 가누지 못한다. 아들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면회 자리에, 그 아들을 해치려 했던 과거가 들어온다.

그 순간 어머니는 무엇을 느꼈을까.

죄책감이었을까. 들켰다는 공포였을까. 잊었으리라 믿었던 아이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충격이었을까. 나는 그 인물의 마음을 확정할 수 없다. 영화가 보여 주는 표정은 하나의 진단서가 아니다. 다만 그 얼굴을 보면서, 한 사건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기억으로 남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는 그날을 함께 세상을 떠나려 했던 날로 기억했을지 모른다. 너무 막막했고, 아이만 남겨 둘 수 없었고,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고 자신에게 설명했을지 모른다. 그 설명 속에서 아이는 줄곧 어머니 곁에 있다. 어머니가 가는 곳으로 함께 가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아들은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날로 기억한다.

어머니의 기억에는 ‘우리’가 있었다. 아들의 기억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있었다. 그 차이가 면회실을 흔든다. 같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같다고 여겼던 두 사람의 마음이, 그 짧은 순간 서로 다른 자리에 선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묻게 된다. 우리가 그 아이의 얼굴을 미리 보았다면, 훗날 아이가 꺼낼 기억을 먼저 들었다면, 그래도 자식과 함께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진 뒤에도, 그 일을 오직 부모의 절망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나의 질문은 모든 절망한 부모를 의심하자는 뜻이 아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더 강해지라는 훈계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살아갈 도움과 보호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부모라면, 그 도움은 아이에게도 닿아야 한다. 부모와 아이를 서로 경쟁시키는 것으로는 어느 쪽도 지키기 어렵다.

그럼에도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 부모의 절망이 아이의 생명을 대신 결정할 권한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는 불편한 차이를 느꼈다. 아이를 시설에 두고 떠난 부모에게는 어떻게 자기 자식을 버릴 수 있느냐는 분노가 쏟아진다. 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부모에 대해서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느냐는 설명이 먼저 나오기도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장면 사이에서 나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는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남겨 두는 일이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시설에서 자란 사람의 삶을 함부로 불행으로 규정할 생각도 없다. 도움을 청하며 아이를 맡긴 일과 아이를 위험한 곳에 두고 사라진 일 역시 구분해야 한다. 다만 아무리 큰 상처를 남겼다 해도, 살아 있는 아이에게는 아직 자기 삶을 살아갈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부모는 그 미래를 전부 알지 못한다. 오늘 보이는 고통이 아이의 남은 생애 전체인 것은 아니다. 지금 자신이 도울 수 없다는 사실과 앞으로 누구도 도울 수 없다는 판단 사이에는, 부모 혼자 닫아서는 안 되는 거리가 있다.

나는 예전에 블로그에 「동반자살 vs 아동살해」라는 짧은 글을 썼다. 아이를 독립된 인격으로 보아야 하며, 위기에 빠진 부모가 다시 일어설 동안 아이를 돌볼 길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때의 생각을 지금도 붙잡고 있다. 다만 짧은 분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어떤 표현을 버려야 하는지 말한 다음에는, 어떤 삶을 가능하게 할지까지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은 그 생각을 천천히 펼쳐 보려는 시도다. 부모의 사정을 듣되 아이의 자리를 비워 두지 않으려 한다. 책임을 묻되 도움의 문을 닫지 않으려 한다. 아이가 살아남은 이후의 삶도 끝까지 생각하려 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과 대화, 생활 장면은 논의를 위해 만든 허구다. 실제 피해자의 마지막 마음을 대신 쓰지 않기 위해서다. 영화에 대한 해석 역시 감독이나 배우의 공식 설명이 아니라 나의 독해다. 확인되지 않은 사건의 속사정이나 통계를 책의 근거로 삼지 않았다. 제도를 논하는 대목에서는 현재 보장되는 서비스와 내가 바라는 방향을 섞지 않으려 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는 아이를 잃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여전히 안고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도움을 청할 말을 찾지 못한 부모일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의 삶을 이 책의 주장에 맞추어 재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아이가 대답할 수 없는 자리에 어른들의 설명만 남았을 때, 우리는 그 설명을 곧바로 아이의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아이에게도 자기의 날이 있었다.

이 책은 그날을 부모의 이야기 속에서 꺼내 놓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