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지 않았다연민이 향하는 순서

1부 · 6장

연민이 향하는 순서

안타까운 사건을 접했을 때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부터 찾는다. 실직, 부채, 질병, 관계의 단절 같은 사정은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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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사건을 접했을 때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부터 찾는다. 실직, 부채, 질병, 관계의 단절 같은 사정은 낯설지 않다. 자기 삶에도 닿아 있는 걱정이므로 그 고통에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그 마음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연민이 도착한 자리에서 생각이 멈출 때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느냐는 말이 그 사람이 한 일에 관한 질문까지 닫아 버리면, 피해를 입은 아이는 다시 뒷자리에 놓인다. 고통을 이해하는 문장이 책임을 지워 주는 문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사정과 책임을 함께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종종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한다. 부모의 절망을 말하면 범죄를 옹호한다고 하고, 아이의 피해를 말하면 가난한 사람의 현실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해를 입어서는 안 되었다.

두 문장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의 취소선이 아니다.

가상의 모임에서 누군가 사건 이야기를 꺼낸다. 한 사람은 부모도 불쌍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아이가 더 불쌍하지 않으냐고 맞선다. 대화는 누가 더 가엾은지를 겨루는 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연민은 순위를 매겨 나누어 주어야 하는 자원이 아니다. 부모에게 도움을 줄 이유와 아이를 보호할 이유는 동시에 충분하다.

다만 말할 힘의 차이는 살펴야 한다. 부모의 사정은 기사와 남긴 글과 주변인의 증언을 통해 이미 길게 전달되었을 수 있다. 아이는 이름과 나이만 알려져 있을 수 있다. 그런 자리에서 아이의 입장을 먼저 묻는 것은 부모에게 연민을 금지하는 일이 아니다. 기울어진 시선에 다른 사람의 무게를 보태는 일이다.

연민에는 때로 자기 확인이 섞인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안도, 나는 저 절망을 이해한다는 동질감, 세상은 원래 잔인하다는 체념이 함께 들어온다. 그래서 연민하는 나의 마음을 아름답게 느끼는 동안 정작 무엇을 바꿀지는 묻지 않을 수 있다. 불쌍하다는 말이 많아져도 도움의 조건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다.

연민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감정 다음의 질문이 필요하다. 그 부모가 일찍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면 무엇이 달랐을까. 아이가 부모 외의 어른에게 불안을 말할 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원을 받는 일이 가족의 실패를 공개하는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면 문을 두드렸을까. 확정할 수 없는 가정이지만 제도를 살피는 방향은 여기에서 나온다.

한편 부모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거리를 벌리는 태도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부르면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처럼 느낄 수 있다. 행위의 잘못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위기와 통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이해는 면죄가 아니며, 비난은 예방의 전부가 아니다.

아이를 위해 부모를 도와야 한다는 말만으로도 부족하다. 부모 역시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다. 아이가 없더라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부모를 돕는다는 이유로 아이가 위험한 관계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각각의 생명을 따로 귀하게 여길 때 두 사람을 함께 지킬 방법을 더 정확하게 찾을 수 있다.

나는 연민을 줄이자고 말하고 싶지 않다. 연민의 시야를 넓히고 싶다. 설명하기 쉬운 사람의 사정에만 머물지 않고, 설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에게도 마음을 보내자는 것이다.

어떤 사건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누구였는지 돌아보는 일은 불편하다. 그 불편함을 견디면 다음에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집의 아이는 어떤 하루를 살고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하루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