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10장
가난은 원죄가 아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알려진 사건 뒤에는 종종 가난에 대한 판결이 따라온다. 능력도 없으면서 왜 아이를 낳았느냐는 말, 형편에 맞게 살지 못한 탓이라는 말이 나온다.
경제적 어려움이 알려진 사건 뒤에는 종종 가난에 대한 판결이 따라온다. 능력도 없으면서 왜 아이를 낳았느냐는 말, 형편에 맞게 살지 못한 탓이라는 말이 나온다. 아이를 걱정하는 듯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서 가난한 부모와 아이는 함께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 말은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 형편이 어려운 집의 아이가 이미 태어나 살고 있는 지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평가는 아무런 식사도 거처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도움을 청하려던 부모에게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는 수치심만 더할 수 있다.
빈곤과 위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가족이 많다. 반대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이라고 안전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소득 하나로 부모의 인격과 아이의 처지를 모두 설명하려 하면 실제로 살펴야 할 관계와 행동을 놓친다.
가상의 정은은 아들과 둘이 산다. 이번 달 생활비가 모자라 통신요금을 미뤘다. 저녁에는 아이와 국수를 먹는다. 아이가 친구 집에서 본 새 기기를 이야기하자 잠시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그 식탁에는 위험한 사건이 예고되어 있지 않다. 부족한 형편 속에서도 살아가는 한 가족의 저녁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 가족을 볼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위험한 부모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지출이 부담인지, 돌봄 시간이 어떻게 부족한지, 받을 수 있는 지원에 접근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 필요를 알아보는 눈과 잠재적 가해자를 색출하는 눈은 다르다. 지원이 감시처럼만 느껴진다면 도움의 문은 더 멀어진다.
그렇다고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에서 지우자는 뜻도 아니다. 돈이 부족하면 선택이 줄어들 수 있다. 일할 시간을 늘리면 돌봄이 비고, 아이를 돌보면 소득이 줄어드는 식의 곤란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구조를 개인의 의지로만 해결하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가난을 사람의 잘못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위험한 행동의 책임도 흐리지 않는 것이다. 어려운 조건은 지원을 늘려야 할 이유다. 그 조건이 다른 사람을 해칠 권한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두 사실을 함께 말해야 가난한 가족을 보호하면서 피해를 입은 아이도 놓치지 않는다.
경제교육을 강조하는 주장도 이 균형 안에서 보아야 한다. 수입과 지출을 이해하고 금융 위험을 배우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배운 대로만 하면 누구나 위기를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은 성급하다. 질병, 실직, 주거비, 돌봄 부담처럼 개인의 계산만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조건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소비를 문제 삼기 전에 우리는 실제 생활의 내역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밖에서 보기에 불필요한 지출이 일자리나 학교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할 수 있다. 물론 잘못된 판단과 책임을 논의할 수는 있다. 다만 그 논의를 아이에게 필요한 지원을 거두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부모의 재정 판단을 평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부모가 돈을 잘못 썼다고 해서 아이의 식사와 교육과 안전을 줄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권리를 부모의 성적표에 붙여 놓으면 가장 보호가 필요한 순간에 아이가 먼저 탈락한다.
정은의 아이가 다음 날 학교에 갈 때 필요한 것은 가난을 이겨 낸 영웅이 되라는 격려만이 아니다. 준비물을 챙길 여유와 굶지 않을 점심, 집의 사정을 친구들 앞에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존중이다. 아이는 매일 자기 집의 가난을 대표할 필요가 없다.
이 책에서 빈곤을 다루는 까닭은 범죄의 이유를 한 가지로 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을 막다른 곳에 몰아넣는 조건을 줄이기 위해서다. 가난한 가족이 더 일찍 더 편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를 지키는 일은 그 가족을 부끄럽게 만드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