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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24장

분노가 끝난 자리에 무엇을 남길까

아이의 죽음 앞에서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지켜야 할 사람이 해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분노는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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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죽음 앞에서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지켜야 할 사람이 해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분노는 더 커진다. 그 감정에는 중요한 기준이 들어 있다. 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는 기준이다. 나는 그 분노를 점잖게 정리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분노가 무엇을 향하는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확인되지 않은 이름을 찾아내고, 남은 가족에게 모욕을 퍼붓고, 비슷한 형편의 부모를 의심하는 방향으로 가면 새로운 피해가 생긴다. 분노의 이유가 정당하다는 사실이 모든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형사적 책임을 엄정하게 묻자는 요구도 구체적인 사실과 법적 절차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더 강한 처벌을 말하는 것만으로 위험에 놓인 아이가 곧바로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책임을 분명히 하는 제도와 위기를 일찍 발견해 지원하는 제도는 함께 필요하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지 못한다.

가상의 토론에서 한 사람은 처벌만 강해지면 해결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지원만 충분하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한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지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수단으로 모든 위험을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은 조심해야 한다. 행동의 경위와 관계의 조건, 지원에 접근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분노는 집중력이 크지만 지속하기 어렵다. 사건이 처음 알려진 날에는 많은 사람이 글을 쓰고 말을 보탠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뉴스가 온다. 남겨진 사람의 생활과 제도의 개선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래서 감정의 크기를 오래 유지하라는 요구보다 관심이 일로 이어질 장치가 필요하다.

어떤 기관이 검토 결과를 내놓기로 했다면 실제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개선을 약속한 사업에 인력과 예산이 붙었는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 대책의 이름보다 작동 여부를 묻는 시민의 관심이 중요하다.

분노를 표현하는 글에서도 아이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가해자를 비난하기 위해 아이가 겪었을 고통을 자세히 상상해 전시하면 아이가 다시 수단이 된다. 피해의 중대함은 잔혹한 상상을 늘려야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침해되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엄중하다.

우리는 때때로 가해자를 인간이 아니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면 행위의 잔혹함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을 사람 바깥으로 밀어내면 어떻게 그런 행동이 가능해졌는지 살필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뜻이 아니다. 책임을 져야 할 행위의 주체로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를 지키는 말은 가해자에 대한 증오보다 넓어야 한다. 아직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집의 부모도 그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사람이 도움을 청할 길까지 닫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잘못의 경계는 분명히 하되 살아서 도움을 받을 문은 열어 두어야 한다.

그 문을 연다고 피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또 다른 아이가 피해를 입지 않게 하려는 일이다. 사회는 이미 일어난 일에 책임을 물으면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험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와 예방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나 역시 글을 쓰다 보면 강한 말로 결론 내리고 싶어진다. 그럴 때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이 문장이 아이를 더 잘 보이게 하는가. 다음의 가족이 도움에 가까워지게 하는가. 아니면 읽는 사람의 분노만 잠시 시원하게 해 주는가.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아이의 죽음은 또 하나의 충격으로만 기억된다. 나는 그 자리에 구체적인 책임과 열린 도움의 길이 남았으면 한다. 감정이 식은 뒤에도 작동하는 보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