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 · 맺음말

아직 쓰이지 않은 날

『마더』의 면회실에는 살아남은 아이가 있다. 자라서 자기 기억을 말하는 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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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의 면회실에는 살아남은 아이가 있다. 자라서 자기 기억을 말하는 아들이 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이 했던 일을 다른 사람의 말로 듣게 된다. 자신이 설명해 온 과거와 다른 기억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현실의 많은 아이에게는 그 시간이 오지 않는다. 자라서 그때가 무서웠다고 말할 날, 부모의 사정을 이해하더라도 자신에게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할 날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채 어른이 남긴 설명만 읽는다.

그렇다고 죽은 아이의 입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을 시킬 수는 없다. 이 책이 허구의 아이들을 따로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아이가 무엇을 느꼈는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채 남겨 두어야 한다. 다만 그 아이에게도 자기 경험을 말할 시간이 있었어야 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마음에는 분노가 있었다. 부모의 죽음에 아이의 죽음을 묶어 동반이라고 부르는 일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끝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표현을 고치자는 요구만이 아니다. 표현을 바꾼 뒤에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생활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피해자로 부르면서 그 아이가 살아남을 경우의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부족하다. 부모의 책임을 말하면서 위기에 처한 부모가 도움을 구할 문을 닫는다면 다음의 아이를 지키기 어렵다. 사회의 책임을 말하면서 누가 무엇을 바꿀지는 남겨 두면 또 다른 선언에 그칠 것이다.

내가 바라는 책은 누군가의 잘못을 쉬운 말로 가리키고 끝나는 책이 아니다. 그 잘못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다른 길을 실제로 만들자고 말하는 책이다. 부모가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함께 있는 것이 위험한 때에는 안전한 거리를 마련하며, 살아남은 아이가 이후에도 자기 삶을 꾸릴 수 있도록 책임지는 사회를 생각하는 책이다.

부모의 고통은 진짜일 수 있다. 도움받지 못한 시간도 사실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이의 죽음은 다른 문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의 크기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결정할 권한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아이를 남겨 두고 떠난 부모가 차라리 낫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문장을 더 오래 고쳐 쓴다. 남겨진 아이의 상처도 가볍지 않다. 시설에서 자란 사람의 삶을 함부로 단정할 수도 없다. 아이를 맡기는 방법과 이후의 돌봄은 더 안전하고 존중받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버려짐과 죽음 사이에서만 선택되어서는 안 된다.

그 사이에 살아갈 길이 있어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한계를 말했을 때 누군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무섭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안전하게 받아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원을 신청한 가족이 창구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를 잠시 보호한 뒤에는 다음 날과 그다음 해의 생활까지 생각해야 한다.

이런 말들이 너무 큰 요구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다시 작은 날을 떠올린다. 빌린 지우개를 돌려주는 금요일, 달리기에서 조금 더 잘해 보고 싶은 다음 주, 저녁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투덜거리는 날이다. 아이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런 날들이 계속될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부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시간이 아이에게는 있을 수 있다. 부모가 만나지 못한 사람이 아이를 도울 수 있다. 지금의 사정과 다른 삶이 열릴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부모가 대신 문을 닫을 수는 없다.

책의 제목에 쓴 ‘그 아이는 함께 가지 않았다’는 말은 아이의 마지막 마음을 내가 안다는 선언이 아니다. 어른이 만든 ‘우리’ 속에 아이의 뜻을 자동으로 넣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같은 가족의 죽음 안에서도 각자의 생명을 따로 보겠다는 약속이다.

아이는 누군가의 자녀였다. 동시에 자기 삶의 사람이었다.

아직 쓰이지 않은 날들이 있었다.

우리가 지켜야 했고, 앞으로 지켜야 할 것은 그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