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지 않았다‘함께’라는 말의 빈자리

1부 · 1장

‘함께’라는 말의 빈자리

우리는 ‘함께’라는 말을 좋아한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어려움을 견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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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라는 말을 좋아한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어려움을 견딘다고 말한다. 그 말에는 누군가 혼자가 아니라는 따뜻함이 있다.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함께 있는 것과 함께 선택한 것은 다르다.

한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의사가 같아지지는 않는다. 가족사진 속에서는 나란히 웃고 있어도 각자의 걱정은 다르다. 이사할 집을 정할 때도 부모는 출퇴근을 생각하고 아이는 헤어질 친구를 생각한다. 가족은 생활을 나누지만 마음까지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죽음 앞에서는 이 구분이 더욱 엄격해야 한다. 부모와 아이가 같은 자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곧 같은 결정을 했다는 뜻일 수는 없다. 누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누가 결정할 힘을 가졌는지, 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 ‘함께’라는 말이 들어서면, 행동한 사람과 그 행동을 당한 사람의 경계도 흐려진다.

가상의 편집실을 떠올려 보자. 기자가 원고를 읽는다. 가족이 함께 숨진 사건이라는 문장 뒤에 부모의 채무와 실직 이야기가 이어진다. 데스크는 기사를 조금 줄여 달라고 한다. 남는 것은 짧은 제목과 몇 줄의 설명이다. 아이의 학교생활에 관한 문장은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며 빠진다.

이 장면에서 누구도 대놓고 아이의 삶을 무시하려 하지 않는다. 짧게 쓰려 했고, 익숙한 표현을 골랐고, 사건을 이해하기 쉬운 이유로 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 아이는 부모의 사정에 딸린 사람으로만 남는다. 제목의 길이를 줄이는 동안 한 사람의 위치도 함께 줄어든다.

말을 바꾼다고 사건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표현을 따지는 일이 공허하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나 역시 이름을 고친 것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는 다음 질문을 결정한다. 가족의 공동 선택으로 이해하면 남은 질문은 그 가족이 왜 절망했는지가 된다. 아이가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이해하면 아이를 누가 지켰어야 했는지도 묻게 된다.

두 질문은 모두 필요하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워서는 안 된다.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았을 때는 확인된 범위 안에서 말해야 한다. 성급하게 범죄의 경위를 확정하거나 누군가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일도 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조심스럽게 쓴다는 이유로 아이의 동의를 상상해 넣어서는 안 된다.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은 함께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동반자살’이라는 말에 먼저 멈추고 싶다. 특히 미성년 자녀의 죽음을 부모의 결정과 한데 묶을 때, 그 표현이 누구의 시선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부모가 남긴 설명을 가족 전체의 의사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말할 수 없는 아이가 그 설명에 동의한 것처럼 문장이 만들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가족을 하나의 주어로 쓰는 일은 편리하다. 가족이 원했다. 가족이 결정했다. 가족이 떠났다. 하지만 그 문장 안에는 나이도 힘도 처지도 다른 사람들이 있다.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의 의사가 가족의 뜻으로 기록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문장을 길게 써야 한다. 한 가족이라는 짧은 말 뒤에 가려진 사람들을 다시 적어야 한다. 누구는 결정을 내렸고, 누구는 그 결정에서 보호받지 못했는지 확인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함께’가 따뜻한 말로 남으려면, 그 안에 각자의 뜻을 담을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 자리가 없을 때 우리는 함께라는 말부터 의심해야 한다.

아이는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아이도 원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