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지 않았다내 아이이지만 나의 것은 아니다

1부 · 2장

내 아이이지만 나의 것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른의 하루가 달라진다. 잠드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일을 선택하는 기준까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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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면 어른의 하루가 달라진다. 잠드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일을 선택하는 기준까지 바뀐다. 부모가 자기 몫의 편안함을 내려놓고 아이를 돌보는 장면은 특별한 영웅담이 아니라 수많은 집의 생활이다. 그 수고를 모르는 척하면서 부모의 책임만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수고가 쌓였다는 사실이 소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내가 낳았고, 내가 먹였고, 내가 여기까지 키웠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이 서운함의 표현일 때도 있지만 아이의 삶을 대신 결정할 권한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사람을 돌본 시간은 그 사람을 소유할 권리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돌봄이 깊을수록 상대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견뎌야 하는 순간이 많아진다.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아이가 좋아하고, 부모가 꿈꾸지 않은 일을 아이가 꿈꾼다. 사소한 차이 앞에서 배워야 할 것은 결국 같은 사실이다. 아이는 나에게서 왔지만 나로 끝나지 않는다.

가상의 저녁 식탁에서 민재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다음 주부터 학원 시간을 늘리겠다고 말한다. 민재는 화요일에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돈을 내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이유로 대화를 끝낸다. 이 장면을 곧바로 극단적인 범죄와 같은 선에 놓을 수는 없다. 많은 집에서 일어나는 갈등이고, 사정에 따라 판단할 부분도 있다.

다만 그 식탁에는 물어볼 문제가 있다. 아이의 말이 결정에 얼마나 반영되었는가. 어른이 책임지는 일이라는 이유로 아이가 이유를 들을 기회까지 잃지는 않았는가. 모든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없지만,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 대하는 것과 비용이 드는 대상으로 대하는 것은 다르다.

아이를 독립된 인격으로 본다는 말은 부모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위험한 선택을 그대로 맡길 수도 없다. 부모는 보호하고 설명하고 때로 제한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권한의 목적이다. 보호를 위해 맡은 권한은 부모의 소유를 확인하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

아이가 아직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아이의 생명이 부모의 생명에 포함된다는 뜻이 아니다. 밥을 혼자 차리지 못하는 사람도 자기 목숨의 주인이다. 어려움을 설명할 말이 부족한 사람도 고통을 겪는 당사자다. 의존은 인간의 한 상태이지,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우리는 아기가 말을 못 한다고 해서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울음과 표정을 살피며 무엇이 필요한지 헤아린다. 그렇다면 말을 못 한다는 이유로 삶에 대한 의사까지 어른이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표현 능력이 작을수록 보호의 책임은 커져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자기 삶의 이유라고 말할 때 그 말에는 큰 사랑이 담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아이가 살아갈 이유는 같을 필요가 없다. 나를 지탱해 준 아이가 어느 날 나와 떨어져 자기 이유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에게는 쓸쓸한 일이더라도 아이에게는 자라는 과정이다.

나는 부모의 헌신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헌신을 계산서로 바꾸지 말자는 것이다. 오래 돌보았다는 이유로 상대의 남은 삶을 청구할 수는 없다. 아이가 부모에게 빚진 사람이 되어야만 가족이 유지된다면, 그 관계에서 아이는 언제 자기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내 아이’라는 말의 ‘내’에는 책임이 들어 있다. 그 아이가 안전한지 살펴야 할 내 책임, 잘못했을 때 바로잡아야 할 내 책임,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면 다른 도움을 찾아야 할 내 책임이다. 그 말에 아이의 생명을 처분할 권한까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다. 동시에 그 믿음만으로 아이의 안전을 보증하지 않으려 한다. 사랑받는 관계 안에서도 한 사람의 권리는 필요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도 지켜져야 할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