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3장
아이에게는 다음 주가 있었다
가상의 아이 서윤은 수요일에 빌린 지우개를 금요일에 돌려주기로 했다. 친구는 급하지 않다고 했지만 서윤은 필통 안쪽 칸에 따로 넣어 두었다.
가상의 아이 서윤은 수요일에 빌린 지우개를 금요일에 돌려주기로 했다. 친구는 급하지 않다고 했지만 서윤은 필통 안쪽 칸에 따로 넣어 두었다. 다음 주 체육 시간에는 달리기를 한다. 서윤은 잘 달리는 아이가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뒤에서 세 번째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어떤 실제 피해자의 마지막 하루를 재구성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사건을 접할 때 쉽게 놓치는 일상의 크기를 생각하기 위해 이런 아이를 상상한다. 서윤은 대단한 꿈을 가진 아이일 필요가 없다. 다음 주를 기다리는 데 대단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아이의 미래를 말할 때 어른들은 자꾸 장래희망을 찾는다. 의사가 되고 싶었는지,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지, 어떤 재능이 있었는지 묻는다. 잃어버린 생애의 크기를 보여 주려는 마음이겠지만, 그 질문에는 조심할 점이 있다. 뛰어난 재능이나 훌륭한 꿈이 있어야만 죽음이 더 부당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우개를 돌려줄 금요일도 미래다. 친구와 화해할 점심시간도 미래다. 보다가 만 만화의 다음 이야기도 미래다. 어른에게 작아 보이는 기대가 아이에게는 하루를 건너갈 이유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사소하다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사소함을 대신 없앨 권리는 없다.
한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오늘의 고통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특정 인물의 마음을 진단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자기 앞의 길을 보지 못할 때, 그 시야가 아이의 가능성까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당장 갚아야 할 돈을 생각하고 있었을 수 있다. 어머니는 다음 달 집세를 걱정하고 있었을 수 있다. 아이 역시 집안의 불안을 느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세 사람이 같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아이에게는 집 밖의 세계가 있고,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이 있고, 부모의 예상과 다르게 자랄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다. 살아남은 아이가 상실과 빈곤과 외로움을 겪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생명을 거두어도 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행을 미리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감당해야 할 어려움을 줄이는 것이다.
가상의 서윤에게 누군가 묻는다. 지금 집이 힘든데 그래도 내일 학교에 가고 싶으냐고. 서윤은 그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집이 힘든 일과 내일 학교에 가는 일이 왜 서로 반대편에 놓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른이 양자택일로 만든 문제 안에 아이가 원래부터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건을 안 뒤에 아이의 물건을 바라본다. 책상 위 공책과 옷걸이의 체육복이 갑자기 슬픈 물건이 된다. 그러나 그 물건들은 처음부터 죽음을 향한 단서가 아니었다. 사용하다 남긴 생활의 물건이었다. 공책에는 다음 장을 쓸 자리가 있었고, 체육복은 다시 입을 옷이었다.
그 물건을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마지막 흔적이라는 이유로 소비하기보다 계속되었어야 할 일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피해자의 집 안을 자세히 보여 주지 않아도, 아이에게 생활이 있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애도를 위해 아이의 사생활을 모두 공개할 필요는 없다.
아이가 어떤 미래를 선택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로 그 모름 때문에 우리는 그 미래를 열어 두어야 한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은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 앞에서 겸손해야 할 이유다.
서윤의 필통에는 지우개가 들어 있다. 누구에게는 하찮은 물건이다. 그러나 서윤에게는 돌아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약속을 너무 늦게 알아보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