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14장
살아남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
아이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안도한다. 그 안도는 당연하다.
아이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안도한다. 그 안도는 당연하다. 그러나 사건을 다루는 사람들의 관심이 그 자리에서 멈추면 아이는 새로운 어려움 앞에 홀로 남을 수 있다. 생명을 구한 뒤의 생활도 보호의 일부다.
어디에서 잠들 것인지, 누가 아침을 준비하는지, 학교에는 어떻게 갈 것인지 정해야 한다. 몸의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고 마음을 돌볼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익숙한 사람과 물건을 잃은 상황이라면 작은 변화 하나도 크게 느껴질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지원은 아이마다 다르므로 하나의 회복 과정을 모든 아이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가상의 서윤은 새로 머무는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어른은 좋아하는 반찬을 물어본다. 서윤은 아무거나 괜찮다고 한다. 정말 무엇이든 괜찮아서일 수도 있고, 까다롭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어른은 대답 하나로 아이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음 식사에도 천천히 묻는다.
보호받는 아이가 늘 밝고 감사해야 할 필요는 없다. 짜증을 낼 수 있고, 약속을 어길 수 있고, 도와주는 사람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 그 행동에 필요한 지도는 하되 도움받을 자격을 잃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어른의 선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회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건에 관해 말하고 싶은 때와 말하고 싶지 않은 때도 다를 수 있다. 침묵이 곧 괜찮다는 뜻도 아니고, 말을 했다고 모든 아픔이 끝났다는 뜻도 아니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반복하게 만드는 절차는 줄일 필요가 있다. 필요한 확인은 전문성과 보호 원칙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종종 아이가 부모를 미워해야만 피해를 인정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을 해친 부모를 그리워할 수도 있다. 사랑했던 날과 두려웠던 날이 같은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워한다는 이유로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도 안 되고, 미워하지 못한다고 아이를 나무라서도 안 된다.
용서 역시 의무가 될 수 없다. 네 부모도 힘들었으니 이해하라는 말은 어른에게는 화해의 권유처럼 들릴 수 있다. 아이에게는 자기 아픔을 빨리 정리하라는 요구가 될 수 있다. 이해와 용서는 아이가 시간을 두고 자기 언어로 다룰 문제다. 보호의 조건으로 요구할 수 없다.
한편 아이를 사건의 상징으로만 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은 아이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지만 아이는 학교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을 수 있다. 새로운 친구에게 자신의 사정을 언제 얼마나 말할지도 스스로 선택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비밀을 강요하는 것과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은 다르다.
지원이 끝나는 시점도 행정의 편의만으로 정해서는 안 된다. 단기적인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생활의 모든 기반이 갖춰진 것은 아닐 수 있다. 누가 계속 연락할지, 돌봄이 바뀔 때 정보는 어떻게 전달할지, 아이가 나이가 들며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을 때 어디에서 도움을 받을지 살펴야 한다.
아이를 자립시키겠다는 말도 조심스럽다. 자립은 아무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다. 필요한 때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제도를 활용하며 자기 삶을 꾸리는 능력이다. 상처를 겪은 아이에게 남보다 일찍 혼자 서라고 요구하면 보호가 또 다른 조기 퇴장으로 바뀐다.
서윤은 어느 날 저녁 반찬이 싫다고 말한다. 어른은 다른 반찬을 꺼내며 다음에는 미리 말해 달라고 한다. 이 장면에는 눈물겨운 선언이 없다. 다만 괜찮다는 말만 하지 않아도 저녁이 계속된다는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이 쌓여 아이는 자기 취향과 불편함을 말할 자리를 얻는다.
살아남은 뒤의 삶을 끝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이렇게 평범한 날을 만드는 일이다. 구조의 순간만큼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날들이 이어져야 생명을 지켰다는 말도 온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