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 27장

누가 그 삶을 불행이라 정하는가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의 죽음을 다룰 때는 특히 경계해야 할 설명이 있다. 앞으로 고생할 것이 뻔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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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의 죽음을 다룰 때는 특히 경계해야 할 설명이 있다. 앞으로 고생할 것이 뻔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 문장에는 아이를 염려하는 듯한 태도가 있지만, 그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다른 사람이 먼저 판정하는 위험이 들어 있다.

돌봄의 어려움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의 지원이 필요할 수 있고, 부모의 건강과 생계가 흔들릴 수 있다. 가족에게 충분한 자원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부담을 말하는 일과 아이의 삶 자체를 불행으로 규정하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가상의 아이 윤호는 말로 의사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 낯선 사람은 윤호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지내는 사람은 윤호가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상황, 편안해지는 관계를 안다. 이 장면은 모든 장애 아동이 같다는 뜻이 아니다. 어른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표현의 방식이 다르면 듣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고 적절한 보조와 전문성이 필요할 수 있다. 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의사를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리면 아이의 침묵은 사실상 어른이 만든 것이 된다. 아이의 뜻을 존중하는 일에는 접근 가능한 의사소통의 조건을 마련하는 책임도 들어 있다.

부모는 아이의 생활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수 있다. 그 지식은 존중해야 한다. 동시에 가장 잘 안다는 사실이 아이의 생명을 대신 판단할 권한은 아니다. 돌봄의 관계가 깊을수록 도움을 줄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체력과 판단에 모든 미래가 걸린 상태는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불안정하다.

부모가 자신이 먼저 죽으면 아이는 어떻게 될지 두려워하는 마음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 질문에 사랑만으로 버티라고 답할 수는 없다. 장기적인 생활과 돌봄, 의사결정 지원과 관계의 연속성을 사회가 함께 생각해야 한다. 미래가 불안하다는 호소를 부모 개인의 과민함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미래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이의 삶을 끝내는 행동을 이해 가능한 결말로 제시해서도 안 된다. 부족한 지원은 바꾸어야 할 조건이다. 생명을 포기해야 할 증거가 아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사회의 실패가 피해를 정당화하는 재료가 된다.

질병과 장애에 관해 쓸 때는 당사자의 삶을 부담의 목록으로만 만들지 않아야 한다. 치료와 돌봄에 필요한 지원을 구체적으로 말하되, 좋아하는 일과 관계, 생활의 기쁨과 불편함을 함께 보아야 한다. 삶에는 도움이 필요한 부분과 스스로 선택하는 부분이 함께 있다. 한 사람을 비용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반대로 감동적인 극복 이야기만 요구하는 것도 문제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거나 늘 밝게 살아야 존중받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 날에도 권리는 유지된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돌봄과 안전을 받을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의료적 판단이나 치료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건강 상태와 필요한 지원은 개인별로 전문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대하는 원칙이다. 다른 사람의 예상만으로 앞으로의 고통을 확정하고 생명의 가치를 낮출 수 없다는 원칙이다.

윤호에게 필요한 도움을 마련하는 일은 부모의 고통을 인정하는 일과 연결된다. 부모에게 쉬고 치료받을 시간을 주고, 아이에게 지속적인 돌봄과 관계를 제공하는 일이 함께 가야 한다. 둘 중 한 사람의 삶을 희생해야 다른 사람이 산다는 틀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의존하는 삶 자체가 아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그를 돌보는 사람을 세상에서 떼어 놓는 구조다. 누구의 삶이 불행할지 대신 결정하는 대신, 어떤 도움이 있으면 그 삶이 달라질지 묻고 싶다.